고전의 심연에 투사한 ‘외곽 보초’의 법열: 김세연의 문학적 사유와 ‘채홍(彩虹)’의 의지

문학의 종언과 AI의 범람(氾濫)이 회자되는 이 건조한 시대에, 김세연은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독서의 복원을 선언하며 우리 앞에 섰다. 그의 최근 저작 『단순함의 순정』은 단순한 서평의 모음을 넘어선다. 그것은 서구 지성사의 거인들과 경남 사천의 흙먼지 날리는 황톳길, 그리고 베트남전의 작열하는 열서(熱暑)를 한데 섞어 구워낸 뜨거운 ‘실존의 자서전’이다. 그는 스스로를 문단의 주류가 아닌 ‘외곽 보초’라 명명하면서도, 그 변방의 시선으로 고전의 핵심을 꿰뚫는 ‘마중물 문학’의 세계를 치열하게 구축해 냈다.

김세연의 사유가 빛나는 지점은 텍스트를 향한 철저한 ‘사유화(私有化)’에 있다. 그에게 독서란 작가의 의도를 복기하는 지적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고전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상처를 객관화하고 치유하는 ‘구원의 의식’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펼쳐 들었을 때, 그는 싱클레어의 내면 성장을 분석하는 관습적 비평을 거부한다. 대신 유년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실존 인물을 소설 속 악당 ‘프란츠 크로머’와 일치시킨다. 과거의 공포가 문학적 형상을 입는 순간, 통제 불가능했던 트라우마는 비로소 객관화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카뮈의 뫼르소 역시 그에게는 실존주의의 상징이기 이전에, 월남전의 전란 속에서 이름 모를 농부에게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고백이다. 그는 세계 문학의 명장면들을 자신의 가장 아픈 기억들과 겹쳐 읽음으로써, 텍스트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통과시킨다.

이러한 ‘육화된 독서’의 뿌리에는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산맥이 버티고 있다. 작가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평생의 교과서로 삼으며, 셋째 아들 ‘알료샤’를 향한 지독한 동경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영혼의 황홀경인 ‘법열(法悅)’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적 합일’과 존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의 단일성’은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심연을 탐사하기 위해 장착한 철학적 장비들이다. 필생의 과업으로 선언한 『속(續)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은 대문호를 향한 오마주를 넘어, 인간 존재의 모순과 구원의 문제를 한국적 현실과 자신의 가족사 속에 용해하려는 거대한 문학적 야심의 발현이다.

사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투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80년대에 펴낸 초기 시집 『새』에서 보여준 맑고 서정적인 영혼의 울림은, 이후 소설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은하수·치자꽃 향기』를 거치며 보다 두터운 실존의 문법으로 진화했다. 특히 2020년 완간된 ‘비곡(秘曲) 5부작’의 대미인 『조개걸음으로 고향가기』는 김세연 문학의 집요함이 도달한 정점이라 할 만하다. 800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서사는 타인의 보폭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느리고 단단한 ‘조개걸음’으로 고향과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장엄한 여정이다.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이 역사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비판적 응시라면, 김세연의 ‘조개걸음’은 자신의 내면과 고향이라는 수직의 심연을 파고드는 구도자의 발걸음이다.

이처럼 시에서 소설로, 다시 비평적 에세이로 이어지는 그의 궤적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채홍문학(彩虹文學)’의 실천이다. 끊임없이 지우고 덧칠하며 자신을 문학의 ‘기니피그’로 자처하는 그의 집필 방식은 완결된 결과물보다 ‘완성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숭고한 예술로 승화시킨다. 문체 또한 그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무기다. 그는 하드보일드한 간결체나 논리적 분석 대신, ‘판소리 타령’이나 ‘술 취한 자의 넋두리’ 같은 타령조의 서술을 선택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이미지를 중첩하며 중얼거리는 그의 문장은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작가의 의식 흐름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여 그 ‘체험의 진실성’에 감염되게 만든다.

결국 김세연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삶의 파편들을 하나의 빛으로 모으는 통합적 세계다. 사천의 들판에서 보았던 오색딱따구리의 자태와 바다 위 유리구슬의 반짝임은, 그가 수많은 철학적 방황 끝에 회복해 낸 ‘단순함의 순정’이다. 그는 얀스 페터 야곱센의 『닐스 리네』처럼 고독한 이방인을 자처하지만, 그가 부은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이제 독자들의 심연에서 본질을 향한 갈망을 길어 올리고 있다. 김세연의 문학은 고전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살아있는 생명력임을 증명하는 고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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