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연탄, 하얀 편지: 한 청춘의 길이 시작된 흔적

 

제1부: 흔적: 연탄·편지·기억에 수록된 수필 “연탄, 펜팔, 그리고 기억 나무”에 대한 문학평론적 고찰.


까만 연탄, 하얀 편지: 한 청춘의 길이 시작된 흔적

「연탄, 펜팔, 그리고 기억 나무」는 수필집 『우리 모두 아픈 청춘이었다』의 서사를 여는 동시에, 작가의 인생 궤적을 형성한 근원적인 ‘흔적(Traces)’을 탐색하는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이 수필은 1980년대 충청북도 제천의 척박한 현실과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가 만들어낸 극적인 대비를 통해, 사소한 연결이 어떻게 거대한 운명을 빚어내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의 문학적 성공은 시간과 공간, 물질과 정신의 극명한 대조를 능숙하게 직조하는 데 있습니다.

1. 연탄의 무게와 고립된 청춘의 풍경

수필은 1980년 가을, 열일곱 청춘의 한 페이지를 충청북도 제천의 연탄 먼지 속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작가는 큰형의 연탄 배달 트럭 조수가 되어 무보수로 일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을 보냈는데, 이는 “곤궁함이 일상이었고, 몸은 고단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연탄 배달의 현장은 물리적 고통과 젊음의 고독을 상징합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22공탄을 트럭에 싣는 일, 손바닥을 뒤덮던 까만 가루, 그리고 비포장도로에서 연탄이 깨져 나가는 손해의 무게 등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차갑고 고단한 현실을 시각적, 촉각적으로 구현합니다. 특히 평창군 미탄의 가파른 언덕길에서 ‘토끼뜀’ 방식으로 트럭을 올려야 했던 에피소드와 안전 난간 없는 좁은 다리를 곡예처럼 건너던 아찔한 순간은, 작가가 처했던 삶의 절박함과 좁은 지평을 은유합니다. 저녁이 되면 공장 목욕탕의 비누 거품은 이내 회색으로 변해 발목을 타고 흘러내렸다는 묘사는, 당시 청춘이 겪어야 했던 노동의 소모적인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암울하고 곤궁한 현실 속에서, 작가는 “비록 연탄을 파는 소년이었지만, 내 미래는 늘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이 고립되고 결핍된 공간적 배경이야말로,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문학적 장치가 됩니다.

2. 편지: 사소함이 빚어낸 거대한 세계로의 약속

작가의 잿빛 현실과 대비되는 것은 태평양을 건너온 펜팔 친구 케리 휴즈(Kerri Hughes)의 편지입니다. 케리의 편지는 작가가 알던 “훨씬 거대한 세계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연결이 시작된 방식의 아이러니입니다. 작가는 해외 펜팔 주선 업체를 통해 얇은 흑백 책자에서 케리를 골라 첫 편지를 보냈으며, 답장과 함께 온 케리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고는 자신이 상상했던 ‘가녀린 소녀가 아닌 풍채가 좋은 여성’이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사진을 숨겼습니다. 이 짧은 일화는 열일곱 소년의 미숙함과 외모 지상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내 그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편지 속의 사소한 문장들이 진정한 가치를 지녔음을 역설합니다.

케리가 전한 일상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가 단순히 즐거운 축제가 아니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해피 홀리데이’라는 인사가 더 보편적이라는 사실이나, 당시 미국 정치 구조(민주당/공화당,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등 시대를 공유하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작가는 이 편지들이 “더 넓은 지평을 향한 약속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먼바다 건너로 이끈 것은 “거창한 사상이 아니었다”고 단언합니다. 대신 “‘오늘은 눈이 너무 많이 왔어.’, ‘너희 동네 크리스마스는 어때?’와 같은, 사소하고 평범한 문장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곧 이 수필의 핵심적인 깨달음입니다.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연탄의 까끌까끌한 질감, 회색빛 비누 거품, 편지봉투의 톱니 모양 가장자리, 날짜 도장, 그리고 편지 속 삐뚤빼뚤한 글씨”와 같은 작고 구체적인 감각들에 있다는 것입니다.

3. 시간의 아이러니와 ‘기억 나무’의 상징성

수필은 42년의 시간이 흐른 2023년의 현재로 돌아와 극적인 전환을 맞습니다. 아들의 도움으로 케리를 찾아냈으나, 그녀가 불과 2주 전인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 시점의 아이러니는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작가는 암 진단과 치료로 인해 책 출간이 지연되었고, 만약 원래 계획대로 봄에 나왔더라면 케리가 살아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와 아픔을 느낍니다.

이 짧은 재회(과거의 편지)와 상실(현재의 부고)은 작가에게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이라는 가장 극적인 형태로 마무리”됩니다. 부모님과 외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낸 케리의 쓸쓸했을 마지막을 짐작하며, 작가는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기억 나무(A Tree to Remember)’ 한 그루를 주문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합니다.

기억 나무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섭니다. 이 나무는 전 세계에서 나무가 가장 필요한 지역에 심어져 “공기 질을 개선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하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작가에게 전해 줍니다. 이는 개인의 아픔과 후회, 그리고 42년 전 연탄 먼지로 까맣게 물들었던 청춘의 흔적이 시간을 초월하여 공공적이며 생태적인 희망으로 승화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연탄 먼지(오염)의 흔적은 이제 기억 나무(정화와 희망)라는 새로운 흔적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결국 작가는 케리를 위한 기억 나무가 자라는 동안, 그들 사이에 오갔던 편지들도 “땅속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뿌리를 뻗어 갈 것”이라 믿습니다. 이는 잉크가 마르지 않은 것처럼, 청춘 시절의 사소한 연결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작가의 현재를 지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결말입니다.

4. 결론: 흔적과 길

「연탄, 펜팔, 그리고 기억 나무」는 아날로그 시대의 고독한 청춘이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온 종이 한 장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품었는지를 섬세하게 기록합니다. 이 수필은 개인의 가장 곤궁했던 순간조차도 이후의 삶을 규정하는 소중한 ‘흔적’이 되며, “아픔은 언제나 길을 만든다”는 수필집 전체의 메시지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작가는 연탄 먼지로 뒤덮였던 과거의 길 위에서 마주했던 아픔과 희망, 후회와 깨달음의 발자국을 더듬어보며, 결국 삶의 여정은 “우체국 창구에서 첫 편지를 밀어 넣던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사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성찰로 끌어올리는 서사적 힘이야말로, 이 수필이 지닌 문학평론적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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